홀로 떠난 여행에서 가장 큰 고역은 끼니를 챙기는 것이었다. 아무도 마주앉아 있지 않은 휑한 앞을 멀뚱히 바라보며 맛있게 접시를 싹싹 비우기란 웬만한 뱃심이 아니고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남 눈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미국이라 해도, 커다란 도시에 나 혼자만 사는 양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뉴욕 한복판이라 해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나는 학기 중에 친구들과 점심시간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점심을 굶곤 했었다. 그런 나더러 생판 모르는 도시에서,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북적이는 식당에 오도카니 혼자 앉아 햄버거를 씹으라니. 오 노! 제일 구석자리에 앉아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웨이트리스 눈치를 빼꼼히 보고 있노라면, 침이 꼴딱 넘어가게 맛있는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요리 앞에서도 절로 식욕이 쑥 내려가곤 했다. 뉴욕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들을 몽땅 섭렵하고 오리라 다짐했던 당찬 포부는 처음 몇 날의 모래알을 씹는 듯 했던 경험 이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브런치 식당, Sarabeth's. 모래알이 아니라 자갈을 씹어 어금니를 몽땅 깨먹는 수가 있더라도 Sarabeth's만은 꼭 가봐야 했다.
화려한 뉴욕 싱글녀들의 일상을 솔직하게 그려낸 드라마
의 인기몰이와 함께 그 배경으로 등장한 Sarabeth's가 브런치 식당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네 명의 주인공들이 한가롭게 모여 앉아 시시콜콜한 일상을 재잘재잘 떠들었던 바로 그 곳이다. 그 명성답게 뉴욕 여기저기에 분점이 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곳은 센트럴 파크 지점이지만 난 가장 한적하고 고급스럽다는 어퍼 이스트 지점을 찾았다. 순전히 다음 목적지와 가깝기 때문이다.
연노랑 커다란 창문 안으로 햇빛이 담뿍 들어온다. 짙은 녹색 장막 중앙에 단정하게 쓰인 Sarabeth's 라는 표시가 요란한 간판을 대신한다. 살짝 들여다보니 가게 안은 손님들로 이미 만원이다. 모두 여행자로 보이지는 않는데, 평일 10시가 넘어가는 시각에 참 한갓진 사람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사진을 찍는 관광객과 부딪혔다. 음료와 빵을 테이크아웃하는 손님을 위한 베이커리 코너는 공간이 비좁다. 좁은 공간이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더 붐빈다. 어깨를 치이며 몇 사람을 지나쳐 서너 계단을 내려가면 테이블이 가득한 홀이 나온다. 동그랗고 네모난 테이블들이 촘촘하게 홀을 가득 채웠다. 안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한 층 올라가면 2층이 있다. 1층을 완전히 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쯤만 채운 채 열려 있는 공간이라 2층 자리에 앉으면 1층 홀이 내려다보인다.
여러모로 가장 공간 효율적인 자리에 쏙쏙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숨이 막히게 답답하거나 하지는 않다. 연한 나무색으로 꾸민 실내와 따뜻한 빛의 조명, 그리고 느긋하고 정겨운 실내 분위기가 긴장을 풀어준다.
다행히도 한 명을 위한 공간은 남아 있다. 기다리지 않고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가게 안이 훤히 보이는 1층 가장 안쪽 자리다. 남의 눈에는 안 띄고 남을 관찰하기에는 딱 알맞다. 친절하고 싹싹한 종업원에게 주문을 마치고 두리번거리며 가게 안을 둘러본다. 살살 눈치를 살피며 손님들도 흘끗흘끗 본다. 10시 36분의 햇빛이 한 가득 들어찬 실내가 달달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소리로 온통 소란스럽다. 한껏 상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재잘대는 모습들이 아주 신나고 정겨워 보인다. 주말에 만난 남자와의 데이트 이야기를 하는지, 어제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지, 히스테릭한
직장 상사의 흉을 보는지. 쉴 새 없이 조잘대느라 입으로 음식이 들어갈 새가 없다. 접시를 깨끗이 비운지가 한참인데도 이야기를 마저 끝내느라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아침나절 이 곳에 앉아 앙증맞은 음식들을 뒤적이면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노라면 마치 드라마 속의 바로 그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뉴요커다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공주님이 된 것 같은 두둥실한 기분을 한층 더 띄워주는 것은 상냥하고 친절한 직원들의 서비스다. 검정색으로 깔끔하게 차려 입은 멋쟁이 웨이트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는 웨이트리스들이 언제나 대기 중이다. 요리조리 눈치를 보고 있다가
커피가 딱 한 모금 남으면 다가와 능숙한 솜씨로 잔을 채워주는 일만 담당하는 사람도 있다. 얼룩 하나 없는 하얀 유니폼을 입은 히스패닉 계 종업원은 손님들이 나간 자리를 재빠르게 치우고 다음 손님맞이를 한다.
주방은 이보다 더 신속하고 바쁘게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깜찍한 겉모양만큼 손이 배로 가는 음식이다. 까다로운 손님의 추가 주문까지 수행하려면 정신이 쏙 빠지게 혼잡스러울 것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곳 홀이 천국이라면 부엌은 전쟁터다. 지글지글 불 소리와 물소리, 접시 부딪히는 소리에 온통 소란스러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있겠지. 설거지를 담당한 이는 손에서 물이 마를 새가 없을 거다. 뉴욕 대부분의 식당에서 설거지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몫이다. 뉴욕 주에서 정한 최저 임금은 시간 당 7.25달러이다. 하지만 설거지와 같은 하위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실제로 받는 돈은 최저 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대우가 가장 나쁜 차이나타운의 식당에서는 노동자들이 1주일에 100시간을 일하고 시간당 2달러를 받는다. 한 달을 꼬박 휴일 없이 일해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을 손에 쥘 뿐이다. 미국 국민 26.4%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에 적절하지 않은 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다. 이들 중 34%가 흑인, 41.8%가 히스패닉 계이다. 시민권이 없는 이민자의 경우 상황은 더 열악할 것이 뻔하다. 고급스럽고 패셔너블한 옷은커녕 헐고 너절한 유니폼 차림을 한 이들, 역겨운 구정물이 철렁거리는 플라스틱 통을 끌고 가던 거리의
청소부들이 떠올랐다.
드라마의 인기몰이와 함께 여유로운 뉴요커의 상징처럼 브런치 문화가 급부상했다. 사실 요리하기 귀찮은 휴일 아침, 늦잠을 자고 집 앞 식료품점에 부스스하게 나와 이웃들과 대충 한 끼를 때우는 것에 불과했던 '브런치'다. 하지만 이제 브런치는 고급스럽게 옷을 차려 입고 정성들여
화장을 한 뒤 굳이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분위기 좋은 식당을 수소문해 차까지 끌고 행차를 하는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문화로 변모해버렸다. 브런치
모임에 입고 나가기 적당한 의상을 코디해주던 한국의 한 케이블 프로는 이런 양상을 정확히 꼬집어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나 속물인 내가 여기 앉아 우습게도 뉴요커 흉내를 내고 있는 동안, 저 싹싹하고 친절한 웨이트리스는 점심만 준비하면 됐을 때보다 몇 시간을 더 일찍 나와 더 오래 일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어중간한 10시의 브런치 타임이 지나 점심시간이 되면 손님이 또다시 밀려들고, 접시를 치우고 한숨 돌리노라면 다시 가장 바쁜 저녁 시간이 코앞일 것이다. 더 많이 일해 더 많이 돈을 버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면서 일하는 시간만 길어졌을 때, 일을 하면 할수록 개인은 손해를 보게 된다. 아침, 저녁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피곤하고 지친 표정의 사람들도, 역겨운 것들을 끌고 가는 거리의 사람들도, 이 곳 환한 곳에서 웃고 떠드는 이들도, 저 벽 너머에서 접시를 닦고 있을 이들도 모두가 사실을 같은 '뉴요커'라는 진실. 그들에게는 브런치는 없고 새벽 아침 식사만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멀뚱히 앉아 프렌치토스트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가 문득 일요일 아침 버섯 라면이 그리워졌다. 어린 시절, 매주 일요일 느지막한 시간까지 아침 단잠에 빠져 있으면 부엌에서 솔솔 풍겨오는 라면 냄새가 나를 깨우곤 했다. 늦잠을 자는 엄마 대신 아빠가 준비한 버섯을 잔뜩 넣은 라면은 그 당시 우리 가족의 고정 '브런치' 메뉴였다. 어린 입맛에는 매콤했던 라면 면발을 찬 물에 식혀 먹던 맛이 아릿하게 떠오르며, 문득 한국이 그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