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가 인사가 되어버린 이 세상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들 할 일은 다 하며 사는 것 같다. 제주도 여행 출발 예정일 일주일 전에 항공사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주말 제주여행 최고의 스케줄은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갔다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오는 것이다. 꽉 찬 이틀을 짭짤하게 보낼 수 있는 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 예약이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모든 스케줄은 완판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금요일 오후 출발, 월요일 곧장 출근’ 코스로 결정했다.

제주도 여행 코스 계획은 제주도 맘

목적지는 우도였다. 제주공항에 금요일 밤에 도착, 서귀포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 우도도 들어가 그곳에서 1박2일을 보내고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 여행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김포로 돌아가 곧장 출근하는 게 대략의 일정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여행을 준비할 때는 꼼꼼한 여행 일정표를 작성하되, 그 모든 일정은 내 마음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제주도 마음이라는 현실에 동의해야 한다. 우도행 꿈은 다음날 아침 펜션 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성산포 선착장에 전화를 하자 ‘포기하라’는 충고가 되돌아 온다.

호랑이가 움쿠리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범섬(호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올레길 7구간의 확실한 볼 거리로 유명해졌고,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지정되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마을로 나가본다. 이른 시간이지만 올레길을 걷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뜨문뜨문 보인다. 제주올레길이 정비된 이후 제주도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 올레길 두어 코스를 걷고 돌아가는 여행자들도 부쩍 늘었다. 이곳은 서귀포 월드컵경기장 근처 법환마을. 올레길을 기준으로 하면 7구간에 해당된다. 바다 바로 앞에는 범섬(호도)이 있다.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움쿠리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범섬’이라 불렸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도저히 그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더 멀리 떨어져야 그 모습이 보일까? 그런데 이 범섬에도 히스토리가 있었다. 100년 가까이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고려에 머물던 세력도 척살당하거나 쫓겨나가게 되었는데, 그 마지막 무리인 목호(목부)들이 투항하지 않고 대들다 이 섬에 숨었는데,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들을 섬멸했다는 게 그 이야기다.

제주도 올레길 가운데 가장 제주도와 어울린다는 칭찬을 듣는 곳 올레길7코스는 최대 5시간의 산책코스다. 올레길을 완주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제주도를 찾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올레길은 제주 관광의 혁신적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법환동을 지나는 올레길 7구간은 외돌개-돔배낭길-속골-수봉로-법환포구-월드컵사거리-서건도-풍림리조트-강정항-알강정-월평으로 이어지는 해안길이다. 외돌개는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진 곳. 바다 바로 앞을 걷는 코스라 올레길 중 가장 제주스럽다는 말을 듣는 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길은 오래 전부터 오늘날까지 이 마을 토박이들이 들락거리던 길이고, 해녀들이 물질 하러 갈 때도 이 길에서 준비하고, 이 길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곤 했다. 올레길을 위해 ‘염소전용로’에 계단을 만든 사연, 풍림콘도 부근의 몽돌 해안 등도 이 코스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들이다. 올레길 7코스는 총 16.4km로 일반인 걸음으로 약 4~5시간을 걸어야 완주할 수 있다.



제주도에서 기차를?

‘기차를 타고 곶자왈 생태숲을 달린다.’ 이런 카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생태와 ‘탈 것’이 어울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현무암 섬 제주에 기차 레일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저절로 ‘에코랜드’로 가는 길로 접어들게 만든다.

에코랜드의 핵심은 ‘곶자왈’이다. 곶자왈이란 숲을 의미하는 ‘곶’과 암석과 가시넝쿨이 뒤엉켜 있는 형상을 말하는 ‘자왈’이 합성된 제주도말이다. 곶자왈 지대는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라는 게 에코랜드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공기, 지형, 공명이 확실히 남달랐다.

12만년 전, 5만년 전 한라산 화산이 폭발하면서 형성된, 오래된 이야기가 있는 생태공원이다. 미니기차를 타고 천천히 달리며, 또는 기차에서 내려 독특한 지역 공명을 느끼며 걷는 기분이 황홀하다.

그것은 화산이 터졌을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암괴로 쪼개지면서 지형 대부분은 요철 형태로 쌓이고, 그렇게 싸인 현무암이 지하수를 보호하고 땅과 숲의 기온을 일정하게 만들며, 심지어 보습 기능까지 발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에코랜드 곶자왈 지대는 약 12만년 전과 5만년 전에 분출한 화산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약 5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곶자왈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으나, 메마른 겨울 보다는 늦은 봄부터 늦은 여름 사이에 한 번 더 와 볼만 하다는 재방문 욕구가 일어났다. 아마 그 시기에 이곳을 찾는다면 쥬라기공원의 느낌에 흠뻑 빠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에코랜드의 주 이동 수단은 기차다. 생태 숲 가운데로 기차가 다닌다는 게 어쩐지 앞 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았으나, 생태를 보전하고, 또한 그것을 공유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레일을 깔게 되었다는 그들의 설명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마구잡이 보행에서 유발되는 생태 훼손의 가능성을 막아보겠다는 자연친화적 발상과, 아울러 입장료 수입을 통해 돈도 벌어보겠다는 기업적 개념의 결합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출발은 에코랜드 메인역에서 이루어졌다. 입장료 1만1000원. 빈티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에코랜드 포레스트 트레인’은 증기기관차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볼드윈(Baldwin) 4-4-0을 변형한 기차로 영국 서번 램(Severn-Lamb)사의 수제품이라고 한다. 기차는 기차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KTX 등은 아닌, 미니기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곳에는 메인역, 에코브리지역, 레이크사이드역, 피크닉가든역, 그린티&로즈가든역 등 모두 다섯 곳의 역이 있는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계절이라서인지 메인역과 에코브리지역과 피크닉가든역에서만 정차했다. 정차한 역에서는 내리고 싶은 사람만 내리면 되며, 역 주변에서 산책하거나 뛰어 놀거나 차를 마시며 쉬다 다음 기차를 타면 된다. 에코브리지역에서 내려서 호수가 있는 숲길을 걸었다.

호수 가운데로 설치한 다리를 건너 넓은 잔디밭을 지나면 유럽풍 풍차하우스와 레이크사이드역, 그리고 호수와 육지를 달리는 수륙양용보트 호버크래프트 캠프가 있었다. 호버크래프트는 캠프를 출발, 호수와 뭍을 달리고 돌아오는데, 재미있어 보이기는 했으나 만만치 않은 소음이 귀를 거슬렸다. 피크닉가든역은 넓은 잔디와 산책길 에코로드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쌀쌀한 날씨 속을 산책했던 터라 내리지는 않았다.

겨울철에는 정차하지 않는 그린티&로즈가든역은 제주의 오름을 재현한 오름 동산과 야생화밭이 있는 공간이다. 유럽식으로 가꾼 정원도 인상적인 곳이다. 역시 초록이 깊은 계절에 오면 더욱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안개섬 제주

일기예보에서는 제주도의 주말이 60mm가 넘는 비에 젖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날씨는 맑았고 바람은 세찼다. 바람이야 제주도의 운명이니 누구든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일, 그저 비나 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시 법환동 펜션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자 바다는 더욱 높은 파도와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비나 오지 말았으면…비나 오지 말았으면…비나 오지…비나…

새벽.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뿌연 어둠이 사위를 뒤덮고 있다. 한라산에서 뿜어져 나온 안개가 섬 전체를 덮어버린 것도 모자라 이제 바다까지 삼킬 기세다. 그러나 바다의 방어도 만만치 않다. 해안선에 다다른 안개 전선은 해풍과의 한 판 싸움을 하면서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30분쯤 외출 준비를 하고 나와보니 안개는 완전히 걷힌 것 같았다.

송악산절벽, 1945년 폐망 직전 제국주의 일본이 구축해놓은 전쟁용 동굴들이다. 을씨년스러운 모습, 몰아치는 파도, 거침없는 파도, 짙은 안개와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동굴 위 돌멩이들이 위험천만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초입에서 관망할 뿐, 접근해서는 안될 위험지역이다.

제주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바다 모슬포와 가장 무서운 화순 앞바다를 보고 싶었다. 모슬포를 향한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안개가 다시 세상을 뒤덮는다. 안개가 왔다가 사라지고, 구름이 백록담을 향해 올라가다 순식간에 없어지고, 구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한라산이 쨍쨍한 햇살 아래 드러나는 곳 제주도, 지금은 안개 모드에 휩싸여있다.

모슬포 해안도로를 따라 20분 쯤을 달리자 송악산이 나타난다. 맑은 날에 올라가면 옥빛 제주해안의 황홀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렇게 안개 낀 날 송악산에 올라가는 사람은 동네 산책객들 뿐이다.

송악산을 오르는 대신 해안으로 내려가 ‘일본군 동굴 진지’ 앞에 선다.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에 구축된 동굴 진지는 송악산 해안절벽을 따라 15개가 나란히 있다. 패전을 예상한 일본군은 동북아시아 최후의 보루로 제주도를 생각했고, 성산포와 이곳 일대에 동굴 진지를 만들어 어뢰정을 숨겨놓고 특공대의 반격을 도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송악산 해안 동굴 기지는 당장 접근을 금해야 할 위험지역이기도 하다. 동굴 위 절벽 곳곳에 붙어있는 커다란 돌들이 언제 수직 낙하할 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동굴 안을 들락거리고 있다. 특별한 장치를 마련, 안전한 접근을 보장하거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나마 이 동굴들을 관찰할 시설이 마련되지 않는 한 다시는 이 절벽에 올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린다.

삼방산에서 화순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랫쪽에서 진입하면 제주도에서 가장 거칠어 보이는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납작하게 엎어져있어서 마치 인공 방파제로 보이는 평바위, 높은 파도, 그리고 묵묵한 모습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삼방산이 영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삼방산 입구에서 화순해안 방향으로 넘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면 곧 ATM 코스와 솔숲이 등장한다. 솔숲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내려가 해안에 선다. 이곳 해안은 긴 일자바위로 이뤄져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방파제 일부로 보이지만 그것은 천연 바위다.

바위의 모습이 둥글거나 뾰족하지 않고 시멘트 블록처럼 길고 납작하다. 유난히 거칠고 높은 이곳의 파도는 누구도 그 납작 바위 위에 올라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해안은 한 시간 이상을 머물며 자신을 되돌아보기에 적당한 적막함을 선물한다. 또한 오늘같이 짙은 안개가 낀 날 운무에 갇힌 산방산의 모습은 신비감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겨줌으로써 ‘자연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자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산과 바다와 오름과 바람 속에 솟아있는 제주도. 이곳은 사람이 그 어떤 마음을 먹어도 결코 그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놔두는 곳이 아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찾아가도, 그 발길은 제주도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행보를 만들 수도 있는, 그래서 더욱 경이로운 섬이 바로 제주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