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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융프라우에서 소주 '병나발'
스위스는 자연만으로 너무나 황홀한 나라였다. 청량한 하늘과 나라 전체를 둘러 싼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볼 때면, 알싸한 겨울날의 청명함과 함께 그 웅장함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내게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알프스 산도, 아름다운 자연도 아닌 잊지 못할 음식들이다.
유럽의 최정상이라는 뜻을 가진 ‘융프라우’는 스위스를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로 꼽힌다. 인터라켄 역에서 융프라우까지 올라 가는 기차의 창 밖으로 보이는 알프스 산맥과 그 주위 새파란 자연이 HD화면을 옮겨 놓은 듯 아름답기 때문이다.
융프라우행 열차 티켓을 구매할 때, 한국관광청에서 발급하는 할인권을 출력해 가면, 10퍼센트의 할인 혜택과 함께 융프라우 레스토랑에서 컵라면과 교환할 수 있는 무료 컵라면 티켓을 준다. (실제로 융프라우의 레스토랑에서는 컵라면을 약 8000원에 판매한다.) 나와 융프라우를 같이 오르게 된 한국인 동행은 오랜만에 있을 컵라면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아침부터 컵라면과 함께할 소주 한 병을 고이 챙겨 기차에 올랐다.
그렇게 융프라우를 둘러보고 12시, 드디어 오늘 여행의 중요한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컵라면 시식의 시간이 찾아왔다. 융프라우 휴게실에 위치한 여러 레스토랑 중 컵라면을 팔고 있는 적당한 식당을 찾아가 점원에게 조심스레 컵라면 티켓을 내밀었다. 잠시 뒤 따뜻한 물이 부어 진 컵라면 한 사발이 감격적인 모습으로 내 앞에 놓여졌을 때 순간 설렘을 감출수 없었다.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도, 13시간의 비행 끝에 로마 공항에 내렸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었다.
우리는 정면에 커다랗게 나 있는 창 밖으로 새 하얀 알프스의 산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라면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가끔씩 뚜껑을 열어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려 공기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더욱 탱글한 면발을 만들기 위한 애정 어린 노력을 쏟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분 뒤, 마침내 면이 알맞게 익고 난 후 나는 유럽 최정상에서의 환상적인 라면 맛을 볼 수 있었다. 매콤하고 고소한 면이 자극적인 MSG에 버무려져 내 입에 들어올 때의 감동이란. 유럽의 달고 느끼한 빵 쪼가리들에 지쳐 위장에서부터 매콤한 고추장을 갈구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가 되던 그날, 자극적인 매운맛이 입의 통각을 마구 건드리는데 가히 감격스러웠다. 곧이어 잔도 없이 소주를 한 입 들이켰다. 그 쌉싸름한 소주가 목을 타고 스윽 넘어가는데, 뒤이어 라면 국물 한입을 마셔주자 뜨뜻한 국물이 소주를 착 감아주면서 그 동안의 고산병 증세를 말끔히 치료해주는 기분이었다. ‘주량이 얼마 되지 않고, 소주는 너무 써서 잘 먹지 못하는’ 것으로 얘기가 되어 있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 깜짝할 새 소주 한 병을 마셨다. 그 때 마셨던 소주의 부드러운 목 넘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점심으로 내 인생 최고의 컵라면을 먹은 후 저녁 메뉴로 선택한 것은 스위스의 전통음식 퐁뒤였다. 퐁뒤는 스위스 알프스 지역에서 시작된 음식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스위스의 대표 음식이다. 스위스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어서 웬만해선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지 않았지만, 스위스까지와서 맛있는 퐁뒤를 못 먹고 돌아가기에는 어딘지 아쉬워서 동행이 가지고 온 가이드북에 소개되어 있던 ‘맛집’을 찾았다.
맛집은 알프스 중턱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그린델발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린델발트는 에니메이션 ‘알프스소녀 하이디’에 등장하는 예쁜 목조 집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동화 같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스키나 스노우보드를 하나씩 들고 지나다니며 “뭐, 이런 데서 스키쯤 다 타잖아요? 인공 스키장에서 타는 건 스키 아니잖아요, 그냥 내리막길 산책이지” 하는 표정으로 슥슥 지나가는데 그 모습이 도도했다.
그렇게 마을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맛집 앞에 도착했다. 맛집이라고 소개된 곳이 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 딸린 레스토랑이어서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5시가 조금 안 된 애매한 시간에 문을 연 레스토랑도 얼마 없겠다 싶어 그냥 들어갔다. 메뉴를 보니, 미트퐁뒤라고 커다랗게 적혀 있는 마음에 드는 메뉴가 53프랑(한화 64000원)이었다. 비싸긴 하지만 둘이 나누어 먹는 메뉴이고 스위스 물가가 또 워낙 비싸다고 하니 ‘먹는 게 남는 거지’ 하는 심정으로 큰 맘먹고 주문했다.
잠시 후 웨이트리스는 우리 테이블이 너무 작다며 우리를 레스토랑의 반대편에 있는 큰 테이블로 안내했다. 설레기 시작했다. 곧이어 테이블을 세팅이 시작됐다. 미트를 익힐 기름 그릇이 들어 갈 중간 공간을 비워 놓은 커다란 접시에 여러 개의 작은 그릇들이 빙 둘려 얹혀 지고 그 위에 버섯, 양파, 아스파라거스 등 각종 야채가 담겨 나왔다. 곧이어 카레소스, 칠리소스, 크림소스 등 6개 정도의 다양한 소스가 각각 작은 접시에 담겨 나와 따로 세팅 됐다. 사이드 메뉴로 곁들여 나온 프렌치프라이와 누들은 식지 않도록 양초 위에 따로 설치된 그릇에 살포시 놓여졌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대망의 미트! 붉은 빛 생 소고기가 한 입 크기로 잘려져 작은 보울에 한 가득 담겨 나왔고, 야채 접시 중간에 놓인 램프 위 빈 공간 위로 노란 기름이 담긴 통이 올려졌다.
어떻게 먹는 것인지 설명을 해 달라니까, 나이프 옆의 쇠창살 같은 것으로 고기를 찍어 기름에 적당히 튀긴 후 야채와 원하는 소스를 곁들여 먹으면 된다고 한다. 이 거창한 요리에 감동한 우리는 연신 사진을 찍으며 시키길 잘했다고 만족스러워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테이블을 제외한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백인 손님 모두가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며 저희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 동양인은 우리뿐이었고, 다른 손님들은 모두 스파게티나 와인 등 간단한 음식만을 먹고 있었다. 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혼자 불쌍하게 물도 없이 스파게티 하나만을 딸랑 시켜 마구 먹고 있을 때 받았던 주위의 연민의 시선과는 다른 시선이었고, 나는 즐겼다!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기를 익혀서 세련된 손놀림으로 소스를 얹고, 야채를 곁들였다. 이미 잘라져 나온 고기를 나이프로 다시 한번 작게 잘라 최대한 고상하게 입으로 넣었다. 양파, 아스파라거스, 크림소스와 곁들여진 고기는 부드러웠고, 맛있었다. 소스와 채소를 달리 하면 아예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느낌이어서 정말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상한’ 식사를 마친 후 자신 있게 ‘bill please(영수증 주세요)’ 라며 우아한 미소로 직원을 불렀을 때, 내게 돌아 온 건 110fr(한화 약 133,000원) 이 정말 커다랗게, 눈물이 날 정도로 선명하게 적혀 ‘나를 봐’ 를 외치고 있던 새하얀 종이 위의 까만 글씨… 그때서야 머리가 휘리릭 돌아가더니 나는 깨달았다. ‘아… 53프랑이 한 사람 당 가격이었구나. 고로 우리는 물까지 총 13만원짜리 저녁을 게걸스레 입에 넣었던 것이구나. 옆 테이블 사람들이 우리를 괜히 쳐다본 게 아니었구나. 여기선 아무도 그런 가격을 내고 미트볼 따위 시켜먹지 않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신기하고, 애처로웠던 거구나’
나는 그 후 모든 거의 모든 끼니를 작은 빵들로 해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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