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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양태자의 유럽야화<28>

세계일주 여행이 이젠 한국인에게도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닐 정도가 됐다. 시간과 여유가 주어진다면 이젠 누구든지 제집 드나들듯 나갔다 올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행 자유가 주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20~30년 전만 해도 한국인의 외국여행은 자유롭지 못했다. 외국, 특히 미국에 가려면 체류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도장 한 말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당시 외국 여행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김찬삼의 세계기행’ 책을 읽으면서 방 안에서 ‘간접 세계여행’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이처럼 나가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몇몇 특수층 외에는 사실 해외여행을 갈 정도로 경제 여건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먹고 살만해지기 시작했던 20년 전부터 세계여행이 자유화되기 시작했다. 한비야씨(54)가 세계 여행 책을 낸 뒤엔 사람들이 세계여행에 더욱 구체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물결을 타고 너도 나도 세계로 떠났다. 그 덕에 이젠 이런 저런 여행안내서가 서점에 넘칠 지경이 됐다.

이런 전제하에 약 150년 전 유럽에 살았던 이다 파이퍼 여인의 얘기에 들어가 보자. 당시에 여자가 세계일주 여행을 시도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에 속했기에 세계여행 후에 발간한 그녀의 여행견문록도 유럽사회에 일대의 돌풍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오늘날의 여성들이 그 어려운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등반하고 나서 매스컴을 타는 것 보다 어쩌면 더 특이한 일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다는 17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남자 형제들과 같이 교육을받았다. 이다는 어릴 때부터 여행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세계여행의 꿈을 늘 꿨다고 한다. 딸을 남자처럼 키우던 아버지의 교육에 늘 불만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 이다에게 여성적인 교육을 시켜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다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자체를 거부했다.

이다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치자 가출해 아들이 둘이나 있는 상처한 남자인 변호사 안톤 파이퍼 박사와 결혼해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이 이다 파이퍼가 됐다. (서양은 결혼하면 남자 성을 따른다. 그러나 요즘 독일은 본인이 원하면 바꾸고, 그렇지 않으면 처녀 때 성을 그대로 지녀도 된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은 얼마나 여성을 위한 사회인가? 자기 성을 죽을 때까지 고스란히 지녀도 되니 말이다)

남편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닫게 되자 그녀는 남편과 별거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그녀 역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지만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을 벌어 자식들을 반듯하게 잘 키워낸다.

드디어 자식들이 성인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을 들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간다. 그녀가 그 당시에 이런 저런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위에 발설했을 때 사람들은 이해는커녕, 여자로서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무척이나 말렸다. 그런 조언에는 아랑곳 없이 그녀는 1824년 3월 먼저 팔레스티나, 다마스커스, 알렉산드리아 등의 성지순례를 끝낸 뒤 낙타를 타고 카이로까지 사막여행을 했다. 이어 시칠리아, 나폴리 등을 거쳐 다시 빈으로 돌아온다.

돌아오자 마자 출간된 그녀의 여행 체험기가 그 당시 7개국어로 번역이 될 정도로 인기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이 책 한 권으로 많은 독자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또 여행 중에 사 모았던 외국 진귀품들을 팔아 보태는 등 다음 여행비를 확보했다. 그녀는 스칸디나비아 여행 준비로 영어와 덴마크어도 새로 배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오슬로, 스톡홀럼 등을 여행한 뒤 다시 여행기를 내놓는다. 1846년 다시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발해 리우데자네이로, 홍콩, 싱가포르, 인디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바빌론,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을 여행한 뒤 빈으로 돌아와 다시 1850년 다시 책을 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다시 인도네시아 섬 자바, 수마트라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에콰도르, 페루 등을 여행하고, 1854년엔 드디어 북아메리카로 향했다. 물론 이 여행기들 역시 책으로 찍어낸다. 그녀는 1856년 마다카스카라에 갔다가 정치적 불안 때문에 구속됐다가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살해될 뻔 했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위기를 잘 넘겨냈다.

그러나, 여행 중에 걸린 말라리아가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여행을 포기하고 1858년 다시 빈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 병으로 인해 그 해를 못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녀의 마지막 여행기는 1861년 출간됐다.

물론 그녀의 이런 여행길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 누구나가 마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기에 그리 신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약간 언급했듯이 150년 전의 그녀의 여행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면 그 당시엔 여성으로서 굉장한 모험에 속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그 당시에 여자가 이런 도전적 사고를 갖고 세계기행을 이룬 것은 대단한 일이어서 파리의 한 단체로부터 업적을 인정 받았다. 또 베를린의 유명한 지구학 단체 회원이 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여행에 대한 찬사로 금메달을 그녀에게 수여했다는 사실이다. 왕이 그녀에게 금메달을 줄 정도였으니 150년 전 이다 파이퍼가 시도한 여행이 여성에 대한 관습과 틀을 벗어 던지는데 얼마나 큰 울림이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은 그 당시와 너무나 달리 마음만 먹으면 여성일지라도 그런 여행이 실현 가능한 사회가 됐다. 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금의 독일에선 성년이 된 여자애들이 자유롭게 집까지 나갈 수 있는 ‘주거 권리’까지 있다. 예를 들어 한번 들어보자. 우리 한국의 여성들이 결혼 전에 집을 떠나 타지방에서 생활하게 되는 경우는 대개가 학교나 직장이 다른 도시에 있을 때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도시에 공부하러 가기 때문에‘ 또는 ‘다른 도시에 있는 직장 때문에’ 딴 곳에 기거한다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에선 집을 떠난다는 게 그런 의미보다 훨씬 넘는 성인으로서의 자유 선언을 의미한다. 한 독일 여자애를 만났다. 18살이 되자 집을 떠나는 데 다른 도시로 가는 것도 아니다. 바로 부모들이 사는 그 도시의 딴 곳에 방을 얻어 나가서는 대학을 다녔다. 그런 것이 일반적으로 용인이 되는 사회가 독일이다.

이다 파이퍼는 150년 전 그 당시에 여성으로서 벌써 고향을 박차고 세계로 나가면서 150년 후에 당도할 여성 권리를 미리 보여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왜 바바라 백 박사가 이다 파이퍼를 유럽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들의 목록에 넣었는지 이해가 더 간다.